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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절) 



말씀과 동행

NKCL 25년 8월 1주차 말씀



<NKCL 말씀과 동행> 8월 첫째 주     <설교: 김영년목사>


본문말씀: 눅16:25(참고 눅16:19-31) “이것을 기억하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누가복음 16장 25절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A. 서론 

하나님께 부름받은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반드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회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겨울 정도로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회개를 해야합니까? 아직도 진정한 회개를 못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는 누가복음 18장에 나타난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영적인 잠에 빠져 있어서 무엇을 회개할지도 모르는 지각없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회개의 은혜가 모두 분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미지로 읽기)

한 부자가 날마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으며 호화스럽게 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고 이름하는 부스럼투성이 거지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허기진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었고 앙상한 뼈마디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운 식사를 했는데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 빵부스러기는 원래 그 집 개들의 차지였는데 나사로가 끼어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개들은 나사로를 동정하여 오히려 그의 헌데를 핧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부자도 죽어 땅에 묻혔습니다. 그도 죽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서 불꽃 가운데 고통당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영원히 꺼질줄 모르는 그 불꽃은 한 올의 물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타오르는 갈증의 고통은 외부에서 지져대는 불꽃의 고통을 압도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절망이 그의 영혼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고통가운데 부자가 눈을 들어보니 어찌된 일인지 저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입니다. ”아니 거지였던 나사로가 아닌가?“ 그는 분명히 ‘나사로’였습니다. 그가 부르짖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만 찍어서 내 혀를 축여주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에게 한 대답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눅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무엇을 기억했을까요? 세상에서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날마다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며 살던 모습들, 반면에 한 하늘 아래 바로 자기 집 대문 앞에서 날마다 굶주린 배를 끌어 안은채 누워지내던 거지 나사로의 모습들, “나는 왜  있는 그를 불쌍히 여길 줄 몰랐을까? 그는 내 동족이며 형제인데... 왜 그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지? 왜 먹을 것을 주지 않았지? 왜 그에게 무관심했지? 왜 그를 외면했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회개의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그 순간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는 그의 다섯 형제들이 떠올랐습니다. “내 형제들은 아직도 회개할 기회가 있잖아?” 그는 다시 부르짖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저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주소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내 형제들에게 증거한다면 그들은 들을 겁니다. 제발 그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날지라도 결코 듣지 않을 것이다.”


B. 본론

(가슴으로 읽기)

부자도 나사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 내세에 들어갔을 때 한 사람은 낙원으로 올라 가고 한 사람은 음부로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가른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놀라도록 단순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다른 이유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때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우리가 축복을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도 절대로 잃어서는 안되는 단 한가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까지 최후의 심판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도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심판의 기준이 나옵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떤 대우를 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놀라웁게도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머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자신의 ‘아픈 손가락’같이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극히 작은 자’는 ‘절대적인 가난에 처한 자, 고난 가운데 있는 자’를 뜻합니다. 바로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 대하여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실상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없는 자였습니다. 부자는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7장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나사로의 일생에 대하여 한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의 보화를 소유한 믿음의 사람인데 왜 평생을 고난 가운데 멸시 가운데 살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쳐야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아마도 그것은 “부자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자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기다려주신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남겨두셨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건으로 읽기)

저는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말씀을 읽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바로 북한 주민이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에 300만의 북한 주민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국 동북삼성으로 수십만의 북한의 딸들이 팔려나갔습니다. 거대한 감옥인 북한 땅에는 5대 정치범 수용소가 있습니다. 함경북도 회령 수용소, 청진 수용소, 평안남도 개천수용소, 양강도 화성수용소, 함경남도 요덕수용소가 있었습니다. 그곳 수용소에서 탈출한 어떤 탈북민의 증언에 의하면 ’지옥이 있다면 여기가 바로 지옥이구나‘ 말했습니다. 그들이 겪는 고난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김정일 시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북한의 주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비교적 자유롭게 중국 쪽 두만강 변을 오갈 수 있습니다. 그때 식량배급소 역할을 하던 교회를 통해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김정은 시대에 와서 대대적인 색출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수가 족히 10만은 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수용소들이 고난받는 교회요 기도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순교한 성도의 피가 호소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곳에서 번제물처럼 온몸으로 드려지는 희생의 기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북한의 성도가 드리는 기도 가운데 남한교회를 위한 기도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부유한 ’‘한국교회가 물질 때문에 타락했으니 회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분단되기 전에는 남북한은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동족이요 친척이요 형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고난 가운데 남한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너희는 북한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느냐?“ 묻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데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느냐?”경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 고난을 받으나 내세에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A’ 결론

(삶으로 이어가기)

저는 ‘북한의 교회는 80년 동안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는데 도대체 그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동일하게 “아마도 한국교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은 아닐까?” 그래서 “고난받는 북한의 형제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이토록 오랫동안 기다리시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돌아볼 때 이런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일깨워주시고 다시금 회개의 불길,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

한국교회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하여 국내외에서 헌신하고 있는 귀한 사역자들과 성도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자의 삶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되어 지구촌 곳곳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중국 동북삼성에 팔려간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사역하는 분들, 러시아에서 북한 노동자들 위해 사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북한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사역자들을 후원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대한민국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귀한 사역자들과 성도를 기억하시고 대한민국을 저버리지 마옵소서!”


’이것을 기억하라‘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의 품안에서 잠들어버린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지금‘이 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달려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만나게 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의 영원한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것을 기억하라” 부자와 같이 ‘소망’이라는 단어가 더욱 고통을 주는 내세에서 ‘이것을 기억하면’ 안됩니다. 영원한 부끄러움과 절망의 속에서 이것을 기억하면 안 됩니다. ‘오늘’, ‘지금’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회개의 열매를 맺기 시작하십시오! ‘지금 당장!!’ 

                    <설교하신 분: 김영년목사>